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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
You of little faith
성경을 읽다보면 영혼의 심연에, 정적을 깨며 떨어지는 무거운 돌과도 같은 말씀과 마주친다. 한 점의 빛도 없는 깊은 우물 바닥에서 나의 본색은 비로소 벼락처럼, 한순간 훤히 드러난다. 은혜다. 어쩌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의 삶에 목적이 있다면 그 은혜의 순간을 할 수 있는 만큼 늘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예수께서는 분명히 작정하셨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기적을 보이신 직후,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배에 태워 서둘러 앞서 보내신다. 그에 대한 설명은 찾아볼 수 없다. 문맥상으로는 홀로 산에 올라 기도하시기 위해 그렇게 하셨다고 봐야겠지만 정작 의미 있는 것은 그 이후의 사건들이다.

물론 규모로 따질 일은 아니지만, 때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기적이 일어난 직후다. 만일 그 오천명의 무리 속에 내가 섞여 있었다면 나의 마음 상태는 어땠을까. 통시적으로 보아 제자들로 대표되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상태, 그리고 그 근원적 믿음은 과연 얼마나 무거운 것일까. 사실은 참담했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이 시대에도 여전히 참담하다.

성경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앞서 보내시고 수만명은 되었을 무리들을 홀로 흩으셨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것 역시 오병이어만큼의 기적이라 할 만하다. 오병이어의 기적의 위대함을 염두에 둔다면, 조금 전의 그 큰 기적을 직접 몸으로 체험한 무리가 마치 마술쇼나 한편 구경한 사람들처럼 그렇게 쉬이 흩어졌다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물론 꽤 많은 사람들이 열두 제자들처럼 그 자리에서 예수를 좇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로부터 복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 그저 기적이라는 사건만을 기억하는 정도였을 것이라는 여러 정황들은 적어도 그들의 영적인 긴장도 그들의 육적인 동선처럼 쉽게 흩어졌음을 폭로한다. 그 참담한 인간의 본색은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불명예스럽게 전승되고 있다. 오늘도 우리들은 복음 앞에서, 말씀 앞에서 놀라고 경악하고 통회하되 그것은 여전히 한 순간의 섬광이다. 통회하고 돌아서 세상과 마주칠 때 우리는 허무하게 망각의 시간 속으로 투항한다. 욕지거리와 아귀다툼의 진흙탕 속에서 세상을 겨우 살아내고 저마다 가슴에 주먹만한 구멍을 감추고 패잔병처럼 교회로 돌아와 고작 한 방울의 눈물을 보이는 못말리게 부족한 존재, 그것이 우리들의 본색이다. 역설적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은 이런 우리들의 자화상을 직시케 하기 위해 있어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믿음이 적은 자여"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 말씀을 하기 위해 작정하셨고, 어쩌면 그를 위해 오병이어도 필요했다. 제자들을 물 위로 몰아내신 뜻은 물 위를 걸어 그들에게 가시기 위함으로 볼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우연이 있다고는 상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무리들과는 달리 오병이어를 통해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재확인했어야 옳다. 그러나 제자들 역시 믿음이라 내세울 만한 행동을 보이지 못했다.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유령으로 오인할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을 바로 곁에 둔 자들로서 유령을 보고 놀라 소리지르는 모습이나 보이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내니 두려워말라"는 말씀을 듣고도 도리어 예수이심을 증명이라도 해보라는 듯한 요구로 첫번째 의심을, 그 요구대로 실제로 물 위를 걷고서도 고작 바람에 놀라 목하의 시퍼런 현실을 부인하는 두번째 의심을 한다.

의심과 염려는 믿음의 반댓말이다. 오병이어 사건은 무리를 배불리 먹이신 것에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베드로를 잡아 올리시며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하심으로 끝나는 셈이다. 그 의심에 대해서, 염려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이미 말씀해주신 적이 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믿음이 적은 자들아" 시리즈의 백미라 할 만한 것은 역시 산상수훈 직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리스도인들에게 염려와 의심은 이미 무의미한 말임을 꾸짖듯 일깨워주시는 이 말씀이야말로 우리들의 심연에 바위처럼 떨어지는 말씀이다. 그런데 이 말씀의 키워드는 흔히 오해하듯이 '믿기만 하면 알아서 뒤를 봐주시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것, 다시 말해 재물이야말로 염려와 의심이라는 뜻이다. 패러디를 해보면, 재물이 잉태한 즉 염려를 낳고 염려가 장성한즉 의심을 낳는 셈이다. 의심하지 않으려면, 의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우리는 재물로부터 우선 자유로워야만 한다. 그러나 세상은 어떤 곳인가. 세상이야말로 재물을 말로 하고 염려와 의심을 룰로 정한 장기판이다.

예수께서 한 번 더 "믿음이 적은 자들아"하고 한탄하신 장면이 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신데에 제자들이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다"고 서로 의논하는 웃지 못할 장면에서다. 우리들의 본색은 말씀을 오독하고 주님을 오인하는 천하의 미련함이다. 그런 우리더러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황송하게도 불러주시는 예수의 말씀은 그래서 은혜다. 예수님의 눈이 여전히 우리들을 향해 있다는 것,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들을 '염려'하신다는 것이야 말로 은혜이고 소망이다.

'믿음이 없는 자들아'라고 하시지 않고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하신 것 자체가 우리로서는 갚지 못할 은혜인 것이다. 겨자씨 만한 믿음, 고작 한 순간의 섬광같은 믿음으로 우리는 감히 천국에 들어가겠다고 배짱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작정하신 예수께 우리는 제자들처럼 그저 유구무언이다. 하늘에서 우리들을 굽어보고 계시는 예수님은 여전히 "믿음이 적은 자들아"하고 계시다.
3/13/2010 11:35:25 PM

4 개의 의견이...
1.
목사님께서 옮기는 김에 역시 QT 나눔 게시판에 2/23/2010 1:48:20 AM에 올렸던 이 잡문도 옮기는 게 좋겠다고 하셔서 또 순종하였습니다.
2.
2/23/2010 1:53:47 PM에 임미자 자매님께서 ["믿음이 적은 자들아~" 이 부분을 읽으면서 묵직한 돌이 가슴으로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더 참아야 하나, 주님의 깊은 한숨 소리와 함께... 고작 겨자씨 만한 작은 믿음이지만 그것이 자라면 커다란 나무가 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요. 믿음은 마음에 심겨져서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어야 진짜일 것입니다. 들은 말씀을 새기고 또 새겨서 의식화 하다 보면 빈 나무에서 열매가 맺힐 날이 잊겠지요.]라고 달아주신 귀한 댓글도 차마 흘리고 올 수 없어서 함께 모셔왔습니다.
3.
고교때교과서에서 본 문장중 "지배를 철 한다"는 글이 생각납니다.참 말도 이상타 했지만 묘한 매력이...승재형제님의 성경을 보시는 모습이 무척 깊은것같습니다.나도 성경의 종이를 뚫을듯 읽어보고자하는 욕구는 있으나 차일 피일 미루다.노안이 오고 말았지요.더이상 미루다가는 돋보기도 안통할날이 도래할텐데,승재형제님이 많은 도전을 줍니다. 공회전소리 요란한 머리도 기어를 넣어, 마련해주신 암송구절도 시운전할 생각...생각.
4.
해천 형제님, 혹 '안광이 지배를 철한다'가 아닌지요. 아마도 한자로 써야 뜻이 통할 듯...'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徹)한다’ 눈으로 아무리 책장을 뚫어져라 집중을 해도 읽고 나면 그때 뿐임을 통감합니다. 이제 승재형제 밖에는 믿을 사람이 없슴다. 저도 요즘 노안이 와서리... ㅎㅎ// 승재 형제, 게시판으로 옮겨 오니 더욱 편안하게 읽히네요. 앞으로도 안광이 종이를 뚫는 귀한 글 '자주자주' 올려 주기를 간곡히 부탁~~! 그리고 허접한 댓글은 흘리고 와도 무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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