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어느 교회의 영성훈련 프로그램의 마지막 날 나는 함께 숙식을 하며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를 들고 있었다. 모두 남자들로만 구성된 20여명 정도의 그룹이었는데 환한 형광등이 켜진 가건물 안에서 나는 한국식으로 양말만 신은 채 단상에 올라 있었다. 내가 몇 번째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정해진 순서대로 한 명도 빠짐없이 간증을 하고 있었다.
평범한 한국 남자가 마이크를 들고 사람들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많지도 않고 길지도 않다. 그래도 우리들은 마치 남자목욕탕에서 초면에도 서로에게 때수건과 등을 들이대기도 하는 것처럼 제법 숫기 있게 말을 이어갔던 듯싶다. 수 분간의 간증들을 우리들은 화기애애하게 ‘제법’ 해내었고, 더러는 울었다.
평범하면서, 남자이면서, 게다가 한국 사람이라면 친화력의 측면에서는 거의 최악의 조합이라 할 만하다. 그런 우리들이 하루 이틀의 숙식으로 이렇게 가까워진 것은 모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취지의 말들이 먼저 봉사자와 사역자들의 입에서, 그리고 우리들의 입에서도 나왔다.
필자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평범하면서, 남자이면서, 한국 사람이면서, 게다가 그 자가 바로 필자라면 확실한 최악의 조합이라고 입을 모을 만하다. 그런 나도 그 형광등 아래서 양말 속의 추운 발가락을 모아가며 간증을 했다. 그런데, 아무리 짧은 간증이었을지라도, 불과 수년전에, 다른 것도 아닌 하나님과 구원에 관한 것이며, 개인으로서는 세상을 향한 최초의 선포였던 그 이야기를, 나는 지금 단 한 구절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신앙양심적 측면에서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것들 중 하나다. 그리스도인에게 간증이란 사실상, 그리고 본질적으로도 삶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만일 ‘간증’이라는 이름하에 우리들의 입을 떠나는 말들에 대한 어떤 신학적 율법적 책임에 있어서라면 나는 아마도 대죄를 지었을 터다. 그러나 나를 정말로 괴롭히는 것은 율법도 신학도 아니고 바로 양심이다. 내게 혹 대죄는 없을지라도 죄의식만은 어쩔 수 없는 셈이다.
나는 과연 나의 주관적 체험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증거했던 것일까. 지금은 기억도 하지 못하는 말들로?
키르케고르는 본인도 아니고 본인의 아버지가, 성인도 아니고 소년시절에, 그것도 너무도 허기지고 추운 나머지 하나님을 저주한 사실이 한 번 있었다는 것만으로 엄청난 죄의식에 빠지게 되었고 결국 인생관이 바뀌게 되었다. 그것에 비하면 나의 양심적 죄의식은 한낱 엄살에 불과하기는 하다.
그러나 이 죄의식이 내게는 일면 소중한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간증이란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보여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간증’이라는 이름하에 이루어지는 일련의 행위들은 청중이나 독자를 향해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간증을 간증자의 입장에서는 세상을 향한 ‘선포’라고 부르고 싶다. 그리고 그것은 청중이나 독자라는 대상 이전에 간증자 스스로를 향한 구원에 대한 확인이자 시험이라는 면에서 소중한 것이며 동시에 치명적으로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이 글에서 말하는 ‘간증’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어떤 대상을 향한다는 목적성을 가진 것으로서, 주관적 체험을 토대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행위로 국한해야만 한다. 묵묵히 그리스도의 향기를 의도하지 않고도 드러내며 살고 있는 참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누도 끼치지 말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성훈련 프로그램의 마지막 날 내가 했던 간증의 문제는 청중이라는 대상을 향한다는 목적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나의 의도가 아닌 것, 주관적 체험이라기보다는 다수가 공유한 또는 공유했다고 믿는 체험이었다는 것, 게다가 그 다수가 동시에 청중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혹 그것이 간증의 선결 조건은 아닐지라도 나의 간증이 자발적이지 않았다는 것, 적어도 수동적이었다는 것이 어쩌면 가장 큰 오류였다고 생각한다.
대체로 오늘날 많이 이루어지는 간증들의 문제는 노래자랑식의 형식에 기인한다. 의도적으로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할애한 후, 노래 잘하는 사람은 나와서 노래하라고 독려하고, 또는 주위의 노래 잘하는 사람을 추천하여 내보내게 하고, 노래에 대한 청중의 반응에 따라 심지어 상을 주기도 하는 식의 형식으로는 정작 간증자의 간증 내용이 진실하고 꾸밈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내용이 아닌 간증자를 높이는 결과만 내기가 쉽다.
나의 문제제기의 동기이자 핵심은 여기 있다. 간증의 내용 대신 간증자가 높아지는 것은 하나님 대신 내가 높아지는 것에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형식의 문제로 속 빈 강정같은 간증들이 양산되기는 하지만 대상을 전제로 하는 간증의 특성상 어느 정도는 필요악에 속한다고 할 수도 있다. 정작 비판받아 마땅한 것은 형식이 아닌 내용의 문제다.
간증의 내용 자체가 진실하지 않거나 꾸밈이 있는 경우, 그것은 논할 만한 가치도 없이 심각한 잘못이 되지만 안타깝게도 가장 흔한 문제로 보인다. 언젠가 우리 목사님께서 지적하신 바대로 이런 류의 간증들은 회를 거듭할수록 확대 재생산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가장 흔한 문제인 까닭은 그런 잘못된 간증을 하는 나쁜 사람들이 많아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쉽게 빠지는 본성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말은 한 입만 떠나고 한 귀만 거쳐도 본래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말 자체의 정확한 옮김만으로도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는다.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상태, 심지어는 그들을 둘러싼 외적인 환경과 분위기에 따라서도 인간의 말은 늘 왜곡된다. 그런 면에서 글이 가진 힘은 자못 강하다. 그러나 글 역시 단순한 글자의 옮김으로 마음 놓을 것이 못된다. 뉘앙스와 행간이 가진 힘은 오히려 본문 이상인 경우도 많다. 문학 혹은 글의 역사는 끝없는 오독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런 근본적이고 인간 본성에 관한 얘기는 차치하고서라도 그런 간증의 문제를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모습이 있어야 할 자리에 인간의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하나님을 염두에 둔다면 욕망은 그 자체로 거짓말이다. 혹 거짓된 욕망이라고 순화하고 싶어 한다면 동어반복일 뿐이라고 답하고 싶다. 그래서 욕망은 시간이 지날수록 피노키오의 코처럼 점점 길어진다. 욕망은 본질적으로 늘 나를 돌아보는 것이고 나와 욕망은 언제나 서로를 자극한다.
그렇게 길어진 코만큼 하나님은 멀어진다.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 간증이라면 거기에는 인간의 욕망이 끼어들 틈이 애초에 없다. 오히려 욕망이 철저히 배제될 때에 하나님은 드러난다. 그런 의미에서는 다소 비관적이지만 진정한 간증은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불가가 아닌 불능이다.
대체로 초자연적 체험에 관한 간증들에서 많이 목격되는 이런 문제들은 출발부터가 문제인 경우가 많다. 초자연을 말하려면 자연에 관해 훨씬 더 장황하게 전제해야 순리다. 자연에 대해 충분히 숙지시키지 않고 초자연을 말하는 것은 뜬구름 잡는 얘기일 뿐이기 때문이다. 초자연이 의미 있는 것은 오로지 자연이 있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이재철 목사가 [새신자반]에서 언급한 “병원이야말로 신유의 은혜의 현장”이라는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초자연적 경험에 관한 간증을 듣다보면 나는 어쩐지 하나님이 God이 아닌 god의 하나인 것 같은 느낌에 빠지곤 한다.
잘못된 간증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바꾸셨다 또는 만드셨다’라는 문장에 도달하기 위해 달려간다. 그럴 경우 필연적으로 간증자의 각색이 첨가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 의도에 관해서라면 우리들의 대답은 일단 ‘모른다’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믿는다’는 있지만 ‘안다’는 없기 때문이다. 본인의 주관적 체험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언하는 간증일수록 하나님을 가리는 간증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간증이 가능하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것은 의외로 간단한 문제다. 나를 드러내는 것을 기필코 억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바꾸셨다 또는 만드셨다’에서 목적어와 동사를 빼고 주어와 형용사만 남겨놓으라.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나의 상태뿐이다. 간증은 주관적 체험을 ‘토대’로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지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체험담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간증은 모두 단순한 체험담을 넘어 줄곧 무용담, 성공담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늘 건강, 명예, 부를 얻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세상적 관점에서의 성공으로 하나님을 드러내려고 한다면 적어도 간증이라는 이름 하에서는 삼가야 할 일이다.
‘기독교 변증’이라는 말을 처음 접한 것은 [순전한 기독교]를 읽고 C. S. 루이스의 약력을 다시 들여다보았을 때였다. 책은 소설가이자 영문학자이자 기독교 변증가로 저자를 소개하고 있었다. 생소한 단어였지만 방금 읽은 책의 감동을 좇아 곧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버렸다.
우연인지 우리 교회에는 목사님을 비롯해 저자의 열렬한 팬들이 많이 계신데, 그 분들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독서량이지만 나 역시도 저자에게 빚진 바가 크다. 나의 회심의 과정에서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은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불현듯 찾아온 홍두깨였다. 당시를 조금 극화해본다면, 이 책은 하나님을 등지고 살고 있던 내 방 책상 위로 어느 날 제 발로 걸어 들어온 듯했다라고 하면 과히 틀리지 않다.
나로서는 금세기의 가장 강력한 기독교 변증의 힘을 처음부터 맛본 셈인데, 그것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나에게 큰 득이 되었다. 나는 앞으로의 기독교, 또는 기독교계의 향방에 어떤 식으로든 변증이 더 큰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는 쪽이다.
간증이던 변증이던 대상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그 대상이 비기독교인이라면 전도가 목적일 것이고 기독교인이라면 격려와 도전이 목적일 것이다. 내 생각에는 대부분의 간증은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하고 변증은 그 반대인 듯싶다. 그런 의미에서 변증은 보다 적극적인 증거의 방법이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증거한다는 것은 안보다는 밖을 향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간증과 변증의 가장 큰 차이는 그 토대다. 간증이 주관적 체험을 토대로 할 때 변증은 객관적 사실을 토대로 한다. 어떤 것을 증명해내고 어떤 일에 대해 증언하고 어떤 결과에 대한 증거를 구할 때에 가장 중요한 밑바탕은 바로 객관성이다. 나의 주관적 체험이나 판단은 아무것도 증명해낼 수 없다. 그러나 물론 그 목적이 하나님임에랴 이런 논거는 실제적 근거가 될 수는 없을 듯하다. ‘하나님을 증거하다’라는 말의 모호함의 이유는 여기에 있다. ‘증거하다’라는 말이 세상적 의미의 증명하다, 증언을 하다 증거를 대다 등의 의미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들이 사용하는 말씀을 증거한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어쨌든 변증의 힘은 객관성을 담보로 비기독교인들을 상대할 때에 가장 크게 발휘된다. 그러나 한편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변증은 늘 필요하다. ‘믿음’은 끊임없는 갱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내포하고 있다. 믿음이 일회적이고 최종적인 것이라면 다시 말해 인간이 그럴 만한 능력을 갖고 있다면 우리가 굳이 하나님을 믿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믿음은 지속적이고 최초적인 것이다. 우리는 믿는다고 고백하는 순간에도 늘 다시 믿어야만 하는 존재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객관적 사실을 토대로 한 변증은 끊임없는 갱신의 촉매제가 될 수 있다.
그러면 변증은 어떻게 가능한가. 변증의 방법에 이르러 대체로 우리들은 주춤할 수밖에 없다. 가령 C. S. 루이스와 같은 변증이 대단한 것은 인정한다 해도 그건 어지간한 식자들은 해내기 힘든 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C. S. 루이스의 저작을 읽다보면 그 지식의 방대함에 아연실색하고 만다. 그와 같은 저작의 상당 부분은 나같은 범인들은 이해 불가능한 영역이기 일쑤다.
그러나 변증은 그들만의 언어를 사용하는 일부를 위한 것이 아니다. C. S. 루이스는 그가 가진 은사대로 변증을 해낸 것일 뿐 그의 방식을 우리가 따라야 할 이유는 물론 없다. 여담이지만 간혹 누군가와 C. S. 루이스의 책의 장점과 감상을 나눌 때면 마음 한구석엔 늘 찔림이 있다.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마치 내가 결코 쉽지 않은 그의 책의 내용을 모두 소화해낸 양 말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을까 하는 찔림이 그것이다. 사실 이것은 퍽 중요한 문제인데, 가령 학교도 제대로 다녀보지 못했지만 독실한 기독교인인 할머니에게 [순전한 기독교]는 전화번호부보다 못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증의 의미를 조금 확장시켜보면 주관적 체험을 토대로 한 것이 아닌 것은 모두 변증으로 볼 수도 있다. 변증은 사실은 간증보다 더 쉬운 증거의 방법일 수도 있다. 가령 산에 다녀와 그 아름다움을 내 입을 통해 전해주는 것보다 산에 데려다 놓는 것이 더 쉬운 방법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쉽고 어려운 것이 아니고 어느 쪽이 바람직하느냐 일 것일 텐데, 나는 하나님에 관해 설명해주기보다는 하나님과 대면케 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는다. 나의 입을 통해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왜곡하기보다는 대상의 눈으로 하나님을 직시하게 하는 것이 옳다. 무책임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생각해보라. 대상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대상의 판단은 나의 몫이 전혀 아니다.
그러나 변증의 가장 큰 맹점은 과연 전적으로 줄곧 객관성만을 붙들고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어떤 변증이던 어느 시점에는 반드시 ‘믿음’에 관해 말해야만 한다. 스스로 사고하는 인격체로서 주관적 요소를 전적으로 배제한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어쩔 수 없이 주관적 요소를 언급하면 무신론자 쪽에선 즉각 공격을 시작할 것이다. 나로서는 설명하기 너무나 힘든 문제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언젠가 다른 지면으로 다뤄보고 싶은 이야기지만, 우리에겐 ‘아전인수’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날 같이 특별히 기독교가 신뢰를 잃은 시대에 변증이 분명히 하나의 해법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속빈 간증들이 줄곧 하나님보다 나를 높이는 오류를 범하는 것을 목도하는 것이 이 시대다. 죄성의 사촌간이라 할 만한 욕망을 토대로 초자연이라는 색깔을 덧입혀 도리어 하나님을 가리는 간증들은 자제되어야 마땅하다. 속빈 간증들이 많건 적건 줄곧 초자연적 체험을 말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단순한 후일담이나 회고에 하나님을 더하는 것이 간증이라고 생각한다면 심각한 오류일 것이고, 그것이 바로 자꾸만 초자연을 내세우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것이 세상적 성공이나 세상적 기준의 높음이라는 결과를 내세우는 지경에 이르면 이제 하나님은 완전히 가려지는 것이다.
조금 본색을 드러내자면, 이 글은 간증에 대해서는 좁게 변증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넓은 의미로 해석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이 시대의 정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간증은 자제되고 변증은 장려되어야 한다는 소견이다.
간증은 몸으로 하고 변증은 입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을 증거하는 데에 나의 주관적 체험은 너무 소중한 것이며 어쩌면 전부이다. 그러나 그것은 섣불리 입으로 옮기기보다는 몸으로 드러나는 것이 훨씬 더 아름답다. 입이 해야 할 일은 변증이고 이 시대는 변증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잊지는 말아야겠다. 가장 뛰어난 변증은 바로 간증이라는 것을.